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이난 전쟁 (문단 편집) === 그 이후 === 사쓰마군의 발도 돌격의 위력을 경험한 정부군 사이에서 백병전을 경시하던 방침을 버리고 일본식 검술을 다시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하는 논의가 분분히 일어났으며, 프랑스식 검술의 무력함도 함께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검술은 제대로 배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기껏해야 3년 근무하던 당시 일본 징병제 하에서는 하나마나라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또 정작 사쓰마-조슈 군도 보신전쟁에서 막부군을 패퇴시킨 비결은 후장식 총과 [[암스트롱포]] 등의 화력 우위였다는 점도 있어 1차대전 이전까지 일본군은 백병전보다는 화력에 집중하는 형태의 군대가 되었다. 막부 편을 들었던 아이즈 번에 비해, 사쓰마는 유신웅번이었고 사이고 계열이 아니더라도 군경에 사쓰마 출신자들이 많았던 탓에 달리 차별은 받지 않았다. 사이고를 배척하고 진압군으로 활약한 오야마 이와오는 훗날 일본 육군 원수 직위에, 사이고 다카모리의 친동생 [[사이고 주도]]는 일본 해군 원수 직위에 오르는 등 사쓰마 계열의 출세도 여전히 이어졌다. 이때 이후로 규슈에서 기승을 부리던 이른바 사족반란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일본 제일의 사무라이로 기대를 받았던 사쓰마 군대조차 참패했다는 점이 무사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 놓은 것.[* 칼만 믿고 들고 일어나다가 망한 것도 아니고 엄연히 총과 대포까지 가지고 접근전에 약한 상대방의 약점을 발도 돌격으로 뚫을 만큼 강력한 전술까지 쓰는 최강의 부대가 졌으니 그 충격이 클 수 밖에 없었다.] 그 대신 사족들은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특정 계파들이 장악한 정부를 양당제의 입헌군주국으로 만드는 운동을 전개하는 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이전까지만 해도 총기류나 도검류의 사적 소지에 큰 제한을 두지 않았고, 이는 사족들의 정서와도 관련이 있었다. 또 전장식의 소총은 후장식의 정부군의 [[드라이제]]나 [[샤스포 소총]], [[스나이더]] 총기의 위력으로 쉽게 제압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쓰마군이 전장식 구형 소총으로도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준 것 때문에[* 사족이 주축이었고 어차피 폐도령으로 칼을 소지하기 힘들어 대안으로 총기 훈련을 장기간 받아 총 사용에 있어 거의 전문가급에 이른 사람들이 많았다.] 이후는 민간인의 총기 소지에 간섭을 많이 하게 된다. 사이고는 일본육군의 유일한 대장으로 군 총사령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카리스마도 대단했다. 모든 직위를 내던지고 낙향했지만 육군 대장 직급은 그냥 유지했을 정도.[*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사이고 휘하 사쓰마군 간부들의 육군 직함이 박탈되었다.] 일본은 정부군이 보여준 추태가 정신적 구심점이 없고 정신교육이 없어서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 최고원수를 덴노로 규정[* [[메이지 덴노]]는 군복을 입은 초상화를 내세웠다.], 정신교육 면에서는 군인칙유 등의 봉건적 요소가 가득한 표어를 내리는 방식으로 향후 정신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본군의 군 교범을 만들어내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전쟁 이후 정치개편에서 사쓰마 출신은 정치권에서 위축되고 조슈 출신들이 정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옛날 같았다면 사쓰마는 아이즈와 같이 반역향이 되었고 설사 같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같은 정치 파벌은 세력이 위축되고 반대 세력이 위세와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갔다. 전쟁에서는 졌어도 지금까지 가고시마현에서는 세이난 전쟁과 사이고를 옹호하는 지역 여론이 강한 편이다. 전투 도중 소실된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은 1960년에 가서야 복원되었다. [[기도 다카요시]]는 전쟁 중인 1877년 5월에 병사했고,[*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이 "이제 그만 좀 하지, 사이고..."였다고.] 사이고는 상술했듯 패전 직전에 할복했으며, 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오쿠보는 전쟁 1년 뒤 카가 번 출신의 사족들에게 암살당했다'''(기오이자카의 변).''' 즉, 이 전쟁 종전을 전후해 유신 삼걸은 모두 사망한다. 또한 그렇게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로 비어버린 내무경 직책을 차지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